일상탈출/제주도

(05-07-03) 제주통일청년회 역사기행

정미자씨 2005. 9. 27. 18:22
용규형의 소개로 제주통일청년회에서 주최하는 답사에 따라가게 됐다. 이번 답사의 주제는 '반전평화의 현장을 가다'로 대정과 화순지역을 중심으로 한 역사기행이다.

아침일찍 집으로 데리러 온 용규형의 새로뽑은 삐까번쩍한 트럭을 타고 집결지인 관덕정 앞으로 갔다.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모여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순간, 예전에 동서울청년회에서 주최했던 '통일기행'처럼 몇 명 안가는 거 아냐 싶었는데...시간이 지나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30여명 정도가 모여들었다. 모인 사람들의 면면도 다양해서 아저씨부터 대학생 쯤 보이는 학생 또래, 그리고 아이를 대동한 부부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였다. 드디어 관광버스를 타고 출발, 오늘 답사의 첫 목적지인 '삼의사비'로 향했다.

'삼의사비'는 영화 '이재수 난'을 통해서도 잘 알려진 신축년 민란의 지도자 였던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세 장두를 기리기 위해 봉기의 진원지인 대정읍 안성리 마을에 세워 놓은 비석이다.




조선 개항 후 프랑스는 천주교를 앞세워 세력 확장의 야욕을 드러냈다. 제주도엔느 1899년 처음으로 천주교가 전래됐는데 1901년에 이르면 영세자 242명, 예비신자 700명에 이를 정도로교세가 확장되었다. 천주교는 신부가 지닌 치외법권을 이용해 경제적 특권을 누리려는 지방 지배세력들이 대거 입교해 급속히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민간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제주 민중의 정서를 무시하였고, 무뢰배까지 합세해 제주 민중과 빈번한 충돌을 일으켰다. 1901년 마침내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을 중심으로 대정지역의 농민세력은 천주교도 타도를 외치며 일어섰다. 이들은 제주성을 함락하여 관덕정 앞에서 천주교도 수천 명을 살상하니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고 조정에서도 군대를 파견해 난을 진압하였다. 이 때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등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프랑스는 당시 돈으로 6315원의 배상금을 제주 민중에게 부과하는 등 정치 경제적인 보복을 단행하였다. (이상, 돌베개의 '한려수도와 제주도' 참고)

이 민란을 두고 제주도의 민중들은 신축년 민란으로, 천주교인들은 성교난으로 그 역사적인 평가를 달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 비를 놓고 천주교측과 기념사업회 측의 마찰이 심했었다고 한다.

처음 비가 세워진 때는1960년이나, 지금 우리가 보는 비는 1997년 마을 청년들이 옛것을 묻고 새로이 세운 비이다.






삼의사비 옆에 서 있는 오리지날 돌하르방. 현재 제주도 전역에 남아있는 돌하르방은 45개, 따라서 우리가 제주도에서 흔히 보는 돌하르방은 대부분 기계로 깍은 근래의 것들이다. 그래서 애써 찾아보지 않는 한 오리지날 돌하르방을 보기는 쉽지 않다.

대정의 돌하르방은 다른 지역 것보다 키가 작고 온순한 인상이 특징이다. 눈은 안경을 쓴 듯 툭 튀어나오거나 윤곽만 새겨져 있는데 어떤 경우든 눈동자는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단다.





삼의사비를 뒤로 하고 향한 곳은 모슬봉의  미군사기지. 이번 답사에 따라오기 전까지 제주도에 미군사기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한반도 최남단의 아름다운 섬 제주에까지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니..--++++++ 얼마전 국방부로 반환되었다고는 하지만, 해방후에는 유격훈련을 받는 곳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미군들의 휴식처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기지로 향하는 길, 멀리 모슬봉 정상에 미군이 지은 레이더 기지가 보인다.





미 정부시설, 불법침입 금지라고 써 있는 빛바랜 표지판. 멀쩡한 남의 땅에 금 그어놓고 자기네 나라 정부 시설이라니...이 오만함은 언제나 처벌받을지..









불침번 도로 표지석?! 참 흉물스럽다.



군부대 앞에 있는 표지.






옛 미군사기지를 뒤로 하고 향한 곳은 일제가 지은 알뜨르비행장. 1943년 이후 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일제는 제주도를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방어기지로 이용하고자 병력 7만을 제주도에 상주시키고, 섬 전체를 요새화하기 위해 제주도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온갖 군사시설을 지었다. 그 가운데 큰 공사가 지금의 제주국제공항인 정뜨르 비행장과 이곳 알뜨르 비행장 건설이었다.











일제는 알뜨르 비행장 안팎에 20여개의 비행기 격납고를 설치했는데, 넓은 들판에 작은 둔덕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격납고는 소위 '가미가제호'로 불리는 자폭용 비행기들이 공습을 피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옛 비행기 관제소 아래에 설명을 듣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





현재 알뜨르 비행장은 오산공군본부에서 관리하는 군유지이다.

제주도 전역에는 이곳 알뜨르 비행장 외에도 일제의 간악한 수탈과 만행을 보여주는 곳이 많다.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한 송악산도 이 중 하나. 송악산 연안에는 10여 개의 동굴이 남아 있는데 이 굴의 폭은 약 3~4m, 길이는 20여 미터로 어뢰정을 숨겨 놓기 위한 것이었다.



대장금의 마지막 장면을 이 굴 한 곳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현장을 뒤로 하고 향한 곳은 섯알오름 탄약고 학살터. 일제는 야트막한 섯알오름의 내부를 전부 파내어 그 내부를 탄약고로 사용했는데,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폭파되어 오름의 절반이 함몰되면서 골짜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으로 검거된 대정, 한림 일대의 무고한 제주도민 193명이 학살되었다.

섯알오름으로 향하는 길.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좌익분자를 색출한다는 미명하에 각 지구 계업사에 불순분자를 체포, 구금할 것을 명령했다. 제주지구 계엄당국은 무고한 양민들과 보도연맹원, 4.3항쟁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사람 등 다수를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검거해 대량학살을 감행하였다.




1950년 8월 20일 새벽2시에 처형된 이들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수습되었으나, 새벽5시에 처형된 132명의 시신은 당국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양도를 거부하여, 사건이 일어난 지 6년 8개월만인 1957년 4월 8일에야 비로소 수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족들이 수습한 시신들은 부러진 팔, 다리 등뼈 등이 뒤섞여 있어 도저히 누구의 시신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이에 유족들은 이 뼈들을 모아 132명의 봉분을 만들고, 유족들이 희생자들의 한 자손으로서 132명의 희생자를 한 조상으로 함께 모시겠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 집단 무덤을 백할아버지한무덤, 백조일손지묘라고 한다.


학살터. 별로 크지도 않은 이 웅덩이에 192명의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는 화순항해군기지 건설 예정지.

해군은 최근 2002년 제주도 도민과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에 부딧혀 유보했던 제주 화순항 해군기지 건설을 다시 추진하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해군은 통일 이후 주변국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상은 최근 주한미군 재배치 등과 관련하여 미국의 MD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화순항은 미국의 해양 MD의 전초기지역할을 담당하게 되며 이러한 움직임을 이북과 중국은 매우 우려스러워 하고 있다.

어떻게 이 아름다운 해안을 메꿔서 해군기지를 만들 생각을 할까...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해군기지가 생길 경우, 다시는 이 아름다운 해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일행.



화순해수욕장



화순 주민 한 분을 모셔서 현안에 대해 듣고 있는 중.



제주도에 살게 되면서,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과 유명 관광지는 많이 돌아보았으나, 오늘처럼 이렇게 가슴 아픈 역사가 깃든 곳들은 미처 돌아보지 못했다. 문제는 이러한 가슴 아픈 역사가 재현되려고 한다는 사실. 만약 해군의 계획대로 화순에 해군기지가 건설되어 이 기지에 미국 항공모함과 이지스함이 들락거리게 된다면, 제주도는 더 이상 '평화의 섬'이 아니라 '해상MD의 전초기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정말 가슴답답한 현실이다. 이럴수록 눈을 부릎뜨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할텐데... 맨날 집에서 잠만 자니..ㅠ.ㅠ...

오늘의 답사는 화려한 볼거리도, 뛰어난 경관도 없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을 배울 수 있는 뜻깊은 기행이었다.